광릉
조선 왕릉은 일정한 기준하에 만들어 진다. 첫째는 '도성 10리밖, 100리 이내'다. 교통과 통신이 열악했던 그 옛날, 임금의 능행길에 갑작스러운 변고가 발생했을 경우 빠르게 환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거리다.
두번째는 배산임수다. 조상살은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이 흐르는 곳을 선호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 국가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불교와 풍수지리를 배척했다.
세번째는 560년 이상을 변함없이 유지 해온 상설제도다. 초기 왕릉은 고려의 능제를 모방했지만 이후에는 세종 때 집대성한 오례의를 충실히 따랐다. 진입공간과 제향공간 그리고 능침공간으로 나누어 능역은 단순 무덤이 아니라 "죽은 자와 산자가 만나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금천교는 속계와 영계를 가르는 경계다. 금천교는 "흐르는 물에 마음을 깨끗이 씻고 드나든다"는 의미가 있지만 능역의 금천교는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오라"느 엄숙한 의미를 담고 있다.
금천교를 지나면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앞에 서면 오른쪽에 전돌을 까라 놓은 조그만 공간이 있다. 산릉을 찾은 임금이
능으로 들어갈 때 선왕에게 네 번 절하는 곳으로 판위 혹은 배위라고 부른다.
홍살문을 지나면 박석이 깔린 길이 나오는데 이곳을 참도라 부른다. 참도는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다.
왼쪽은 혼령이 다니는 신도이고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어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제국를 선포했던 고종과 순종의 홍유릉는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신도와 황도와 어도다.
정자각 동쪽에는 2개의 계단이 있다. 일명 동계다. 왼쪽은 신령이 오르는 신계고
오른쪽은 임금과 제관이 오르는 어계다.
임금이 선왕의 혼령을 모시고 동쪽 계단을 올라 정자각에서 제향을 드리면
혼련은 신교를 건너 신로를 따라 능침에 오르고
임금은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 환궁 길에 올랐다. 이를 동입서출이라고 한다.
황제의 제항공간은 일자형이고, 제후의 제향공간은 정 자형이다.
정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에는 잡상을 얹었다. 홍살문 쪽으로 나온 익랑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다.
정자각 뒤쪽에는 산자와 만난 죽은 자가 자신의 능침으로 돌아가기 위해
꼭 건너야 하는 다리와 길이 있다. 또 좌측에는 축문을 묻고 태우던 예감, 우측에는
제향을 마친 제관이 산신에게재를 올리는 산신석이 있다.